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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TIVITY - LIFE/달리면서 얻게 된 소중한 것들

달리기 전 나의 삶과, 지금의 나를 만들어준 기회.

by EMONDA 2020. 5. 14.

약 10년 전의 수험생 시절.

나도 대부분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금수저를 물고 태어나지는 않았었다. 나는 나를 흙수저라고 평가하지 않지만, 대중의 눈에서는 아마 흙수저였을 가능성이 많다. 

철없이 학창 시절을 보내면서 기초는 없었고 꾸준히 쌓아 올린 기초와 기본이 없으니 아무리 열심히 공부하려고 해도 썩 나아지지 않았다. 하지만 훌륭한 스승님을 만나고 '맨땅에 헤딩해보자.'라고 다짐하며 고등학교 2학년과 3학년을 보냈고 내가 노력한 만큼의 성취를 할 수 있었다. 내가 노력한 것은 새벽 2시까지 책상에 앉아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고 새벽 6시에 일어나서 일찍 학교로 가서 책상에 다시 앉았다. 

그때는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다른 친구들이 자는 시간에 조금이라도 일찍 일어나서 조금이라도 더 공부해야 그나마 따라갈 수 있었기에. 결과만 말하면 좋았다. 하지만 이때 나는 심각한 체질적인 문제를 겪기 시작했다.


  고등학교 2학년 때쯤, 어느 날부턴가가 숨이 잘 안 쉬어졌다. 차라리 급격하게 숨 쉬기 어려웠다면 얼른 병원에 갔을 테지만, 그렇지도 않고 아주 서서히 불편함이 느껴졌다. 그러던 어느 날, 너무 답답함을 느끼고 병원에 갔다. 처음에는 동네 작은 병원에 갔는데 진찰이 어려우니 대학병원에 가보는 것을 권유했다. 그때 심정은 정말 참담했다. 정말 무슨 큰 병이 걸린 것처럼 심장이 마구 요동쳤다. 혼자 가기 무서워서 직장에서 일하고 계신 어머니에게 함께 가자고 했다. CT를 찍고 진찰을 받고 결과를 기다렸다. 그때 의사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나의 머리를 심하게 뒤흔들었다. '그냥 스트레스성이네. 입시 준비하느라 정신적으로 많이 약해진 것뿐이고 제일 약한 부분에서 증상이 나타난 것이 아닐까 한다.' 이 말을 듣고서 정말 억울한 느낌이 들었다. 가슴 졸이면서 병원을 오갔던 그 며칠의 긴장감이 스트레스라는 너무 허무한 한 마디로 종결된다는 사실 때문에. 하지만 더 억울하고 화가 났던 것은 그 의사 선생님의 말을 듣고 통증과 호흡이 불편했던 증상들이 말끔히 없어졌다는  사실이었다. 이때부터 나는 조금씩 나의 건강에 대해서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 순간은 나에게 가장 중요한 시간이었다. 정말 공부만 생각하면서 지냈고 내가 만족할만한 수준의 결과를 이끌어 냈다. 하지만 하루에 십 여시간을 책상에 앉아있다 보니 가장 큰 문제가 생긴 것이 바로 체중 증가였다. 나는 내가 살이 많이 쪘다고 인식하기 전까지는 살이 찌고 관리를 해야 한다는 얘기 자체를 우습게 생각했다. 대입 준비 전까지 나는 60KG 초반을 넘어 본 기억이 없었다. 대입 준비를 하면서 공부하는 에너지가 필요하다는 명목으로 닥치는 대로 먹었고 주말에는 학교에서 하루 종일 있었기에 급식이 나오지 않아 배달음식을 시켜먹는 일이 태반이었다. 대입 후에는 미성년자를 벗어나고 성인이 되었으니 친구들과 매일 술을 마시고 다녔고 절대 1차에서 끝내는 법이 없었다. 그저 그 삶을 만끽했던 것이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때부터 계속 체질은 변하고 있었던 것이다.


  체질의 변화는 습관에서부터 이루어진다. 술 마시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고 음식은 당연히 기름지고 자극적인 것을 찾았다. 어느 날은 어제저녁에 먹었던 피자를 아침에 먹고 점심에는 혼. 자. 서. 맥도날드 햄버거 라지 세트도 모자라 프렌치 프라이 라지를 하나 추가해서 모조리 먹어치우고 저녁에는 치킨을 시켜서 소맥을 먹은 날도 있었다. 아니 이런 날들이 비일비재했다. 그러면 다음 날 속이 안 좋아서 힘들어하면서도 속이 안 좋을 때는 기름진 것으로 흘려보내 줘야 한다며 똑같이 바보같이 반복했었다. 먹는 술의 양도 적지 않았다. 유전적으로 술이 약하지 않다 보니 만족할 만큼 먹기 위해서는, 그러니까 취하기 위해서는 소주 서너 병은 기본이었고 더 마시는 날도 많았다. 그때는 그게 즐거웠다. 맛있는 것을 먹고 친구들과 좋은 시간을 그렇게 보내면 삶이 행복한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매일 술을 마시는 친구들과 오늘은 몇 병이나 마실 수 있나 내기를 하기도 했고 내가 더 잘 마시네, 네가 더 잘 마시네 하면서 어쭙잖은 허세를 부리기도 했다. 그것이 얼마나 나의 몸을 망가뜨리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말이다.


  나는 군 복무를 간부로 했다. 임관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체력시험을 봐야 했고 정말 반짝 운동해서 체력시험을 치르고 가까스로 턱걸이로 합격하곤 했다. 이런 경험이 나를 더 안 좋은 쪽으로 몰고 갔다. 먹고 즐기다가도 잠깐 힘들면 눈 앞에 과제 하나를 해치울 수 있다 보니 꾸준히 운동을 하거나 체중을 조절하는 것 자체를 시도하지 않았던 것이다. 하늘이 도운 것일까. 다행히도 임관을 했다. 이때 나에게 첫 번째 기회가 왔다.


  실제 부대로 가기 전에 신분화 교육과 기본적인 간부 소양을 배양하기 위해 교육을 받는 기간이 있다. 이 교육이 시작할 때 나의 몸무게가 80KG 후반 대였다. 키가 174CM인 것을 감안했을 때, 정말 무거운 몸이었다. 교육이 시작했을 때, 어땠을까? 아무것도 따라가지 못했다. 처지기 일쑤였고 동기들과 함께 구보를 하면 매 순간 죽을힘을 다해야 겨우 함께 들어올 수 있었다. 지금 하루 12-15KM를 매일 뛰는 내 모습에서 그때를 평가해보라고 하면 미련하기 그지없는 인간이었다. 하지만 그때는 어쩔 수 없이 해내야만 했다. 더불어 각종 훈련과 교육, 타이트한 일정이 70KG 중반까지 만들어주었고 탄탄한 몸을 만들어주었다. 그때 잘했어야 했는데.


    간부들이 소위 야전이라고 불리는 실제 근무지로 발령을 받게 되면 모든 것이 새롭다. 교육기관에서 배운 것과 실무는 다른 것도 많고 계급만 높지 이등병 아니, 훈련병과 다를 바 없다. 모든 것이 어렵고 새로운 그 환경 속에서 고향을 떠나 외로운 삶을 살기 시작하면서 나는 또 한 번 무너졌다. 대한민국 군인들이 모두 나 같은 것은 아니니 오해의 소지가 없길 간곡히 바란다. 앞서 얘기했듯이 나는 유전적으로 술에 강하다. 대한민국 사회에서 술에 강하면 술을 좋아하는 사람들과 가까워지기가 비교적 쉽다. 술을 좋아하는 사람이 상관이거나 나와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동료나 상관, 하급자라면 술이라는 매개체가 인간관계에 큰 도움을 준다고 판단이 서는 경우가 더러 있다. 술도 강하고 두리뭉실한 성격 탓에 나는 거의 모든 술자리를 빠지지 않고 함께 했다. 덕분에 군에서 간부로서의 위치는 나쁘지 않았다. 물론 내가 술로만 군생활을 한 것은 아니었기에 당당하게 얘기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생활이 계속되면서 다시 한번 체중이 80KG를 웃돌기 시작했다. 그때는 다이어트 약을 먹어보기도 했다. 30일 치를 40만 원 가까이 주고 샀는데, 변비가 생기고 몸이 가려운 부작용이 생기면서 일주일 정도 먹다가 버려버렸다. 그때 나는 돈도 버렸지만 체중을 감량하겠다는 마음 자체도 버려버렸다. 이제 중요한 것은 단순히 체중계의 숫자만 늘어난 것이 아니었다. 몸 자체가 망가진 것이다. 건강하지 않게 살이 찐 것이다. 나는 그 당시 군에서 간부들에게 강조했던 '특급전사' 타이틀을 한 번도 해내지 못하고 전역했다. 그런 군 생활에서 나는 체중이 증가해서 형편없는 몸을 가진 사실과 더불어 자존감이 뚝 떨어진 정신상태를 가지고 군을 전역해버렸다. 


  군에서 전역 이후 비슷한 삶은 계속 이어졌다. 전역 후에 자전거 전국일주라는 나의 버킷리스트를 해냈지만 그것이 끝나고 난 뒤에 삶은 이전과 다를 바 없었다. 자존감이 뚝 떨어진 상태라는 것은 내 스스로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날들을 보내고 있었다는 상태이다. 취업할 생각도 안 했고, 준비도 안 했다. 그저 먹고 마시고 노는 것이 좋았을 뿐이다. 이번 달만 놀고 준비하자, 다음 달은 여행 가야 되니까 그다음 달부터 진짜 열심히 해보자 하면서 말이다. 매일 같이 술을 마셨고 이제는 제약이 없으니 집에 들어가지 않고 하루 외박은 물론 2일, 3일 외박해가면서 못 만났던 친구들을 만나면서 술을 마셨다. 그때 내가 제대로 된 정신상태로 잠에서 깨고, 하루를 살아내고 다시 잠들었던 날이 며칠이나 되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술에 절어서 기름진 음식에 파묻혀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삶으로 살아간 것이다. 그러던 와중에 위기 상황이 발생한다. 쓸 돈이 없어진 것이다. 술을 마시고 싶어도 돈이 없고 술 사줄 사람도 하나, 둘씩 없어지고 주변 친구들은 취업 준비, 유학으로 다들 곁에 없다 보니 거지 신세로 집에만 있게 된 것이다. 짝지를 만날 돈도 없게 되자 정말 위기를 직면했다. 그래서 나는 일을 시작하기로 한다.


  지금 나는 내가 하는 일을 무척이나 사랑하지만 이 일을 처음 하게 된 것은 그저 우연이었으며 이렇게 까지 이 일을 사랑할 줄 몰랐다. 하지만 일을 하면서 몸이 고생했다는 이유로 또 닥치는 대로 먹기 시작했다. 먹는다고 힘이 나지도 않을 텐데 먹고 마시고를 반복했다. 일을 시작하기만 했지 돈도 늘 없었다. 매일 먹고 마시는 것이 최고의 삶이라고 여기는 것은 그때도 당연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긴 시간을 보내다가 나에게 마지막 기회라고 여겨졌던 하나의 사건이 발생한다.


  2019년 1월, 나는 독감에 걸린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그렇게 아팠던 적이 없었다. 밤새 끙끙 앓고 눈이 뒤집히는 느낌도 여러 차례, 태어나서 처음으로 병원이 간절해졌다. 집에서 걸어서 5분도 채 안될 거리를 20분 정도 기어가다시피 하면서 도착했다. 가다 멈추다를 몇 번이나 반복했는지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기 위해서 갔다. 그때 당시 나의 체중, 90KG를 넘은 순간이다. 의사 선생님께서 진찰을 하시는데 상의를 올려보라고 하신다. 아무 생각 없이 올렸는데 나이가 지긋하신 어르신인 의사 선생님께서 '이런 몸이면 언제 아파도 이상하지 않은 몸입니다.'라고 말씀하셨다. 정말이지 너무 창피했다. 오히려 나이가 지긋하신 그 의사 선생님의 몸매가 훨씬 탄탄하고 매력 있었다. 진찰 후에 알고 보니 독감이었다. 지금까지 한 번도 이렇게까지 아파보지도 않았고 독감? 그런 것에 대해 관심도 안 가지고 살았었는데 말이다. 의사 선생님께서 독감은 무조건 격리되어야 한다며 집에서 절대 나가지 말라고 강력히 말씀하시면서 이런 몸이기에 면역력이 떨어진 것이고 옳거니 하고 바이러스가 들어간 것이다 하면서 조금은 나무라는 투로 나에게 말씀하셨었다. 이런 몸..


  나는 그날부터 내 삶을 찾기로 결심했다. 어떻게든 정상으로 돌아오고 싶은 마음이 생겨났다. 나에게 독감이라는 수단으로 기회를 준 것이라고 생각했다. 5일의 격리를 마치고 나는 2019년 1월 25일부터 다시금 내 삶을 찾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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